권용선 서울과학기술대 강사
           권용선 서울과학기술대 강사

 

  어떤 소리는 너무 멀어서 들리지 않는다. 간신히 들려도 잔향은 오래 머물지 않고, 사람들은 곧 잊어버린다. 

  2010년 어느 날, 당진의 한 철강업체에서 작업 중이던 20대 청년 하나가 용광로 쇳물 속으로 사라졌다. 펄펄 끓는 용광로 쇳물에 사람이 빠져 흔적 없이 사라지다니. 설화나 민담도 아니고 21세기 산업도시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사람들은 경악했다. 누군가는 그 사건을 두고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제목의 추도시를 썼고, 시로 노래를 만들었으며, ‘공유’하며 퍼 날랐다. 시민들은 청년을 안타까워했고 진심으로 애도했다. 하지만 곧 잊혔다. 당진이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평소에는 주목할 일 없는 지방 도시였기 때문일까. 청년이 용광로에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의 마지막 비명이 너무 짧았기 때문일까. 청년의 비명은 사라졌고, 우리는 곧 그를 잊었다. 

  일하는 청년들의 죽음은 계속되었다. 2016년 구의역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어 김군이 사망했다. 2017년 압착기에 끼어 이민호가 사망했다. 2019년 끼임 사고로 김용균이 사망했다. 2019년 엘리베이터가 추락하여 김태규가 사망했다. 2020년 파쇄기에 끼어서 김재순이 사망했다. 2021년 컨베이어벨트 날개에 깔려서 이선호가 사망했다. 청년들은 잠깐 주목받은 후 빠르게 잊혔고, 살기 위한 일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노동자의 수는 해마다 늘었다.

  ‘그 법이 언제 정착돼서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르겠고, 단지 지금은 그냥, 제발 귀를 열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들처럼 작은 목소리로 내뱉는 노동자들, 이런 일을 겪은 부모들의 사소한 목소리 하나하나에요’(<한겨레21>, 2021.08.17.) 절실과 절박과 절망 속에서 절규하는 한 어머니의 목소리 위에 여러 목소리가 포개졌다. 안전하고 위생적인 노동환경과 기업의 관리 책임을 강하게 묻는 법의 필요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한동안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2022년 1월 27일부로 발효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애초의 문제의식에서 상당히 후퇴한 방식으로 시행됐고, 그 해에만 다섯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났다. 승강기 추락, 감전, 끼임, 배달 오토바이 사고 등 사인(死因)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가장 낮고 어둡고 위험한 일터에 머물던 비정규직, 계약직, 일용직 하청 노동자들이었다. 죽음, 특히 사고로 인한 죽음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우발적이고 무차별적인 방식으로 찾아온다. 하지만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산업재해는 언제나 ‘예고된 죽음’이다.

  그리고 올해 1월, 한화오션의 거제 옥포 조선소에서 다시 두 명의 청년 하청노동자가 작업 중 사망했다. 새로운 법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안전보건시스템이 저절로 가동되지는 않는다. 사측은 매년 300억에서 600억 규모의 안전 보건 관련 예산을 추가 집행하고 업무 인원도 증원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스템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작동되지 않았고 사고는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사망한 청년 노동자들은 업무상 승인된 작업자가 아닌, 이름 없는 하청 노동자였다. 외주화된 위험은 청년들과 60대 이상 노년층 그리고 이주노동자라는, 가장자리에 있는 노동자들을 빠르게 공략해 그들을 죽음으로 이주시킨다. 

  법 시행 이후 현재까지 산업재해로 부상 당하거나 사망한 노동자들의 수는 이전에 비해 미세하게나마 줄어드는 추세이다. 시행 이후부터 지난해 12월까지 발생한 510건의 사건 대부분은 여전히 노동청과 검찰 수사 중이고, 그중 13건에 대해서만 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아직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얼마만큼 실효가 있을지, 기업의 안전관리의무가 얼마나 유의미한 방식으로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법이 하는 일과 다른 차원에서 시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도 있음을 말하고 싶다. 그들, ‘살았을 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죽어서도 그들의 삶을 기억해 주거나 기록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죽어 묽어진 존재들’(이문영,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 우리 옆엔 여전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 무심해도 좋을 만한 삶,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죽음은 없어야 한다.

 

권용선 서울과학기술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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