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우리 역사학계의 과제 중 하나는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에 1970년대 들어 내재적 발전론(자본주의 맹아론)이 주류 흐름으로 등장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경제사학계에서는 기존의 식민지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하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제기했다. 사실 경제학계의 이러한 인식은 해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전개된 ‘식민지 근대화 논쟁’은 경제학자와 역사학자가 근대를 보는 관점이나 식민지기의 보는 시각이 확연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식민지 근대화에서 ‘근대’를 논하자면, 그 의미가 다양하다. 말하자면, 식민지기를 통해 ‘자본주의’로 진입하는 근대화는 이룩했으나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의 근대화는 실패한 것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논점을 ‘한국 자본주의의 발달’로 국한시켰다.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과 발달에 있어서 식민지기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한국의 자본주의는 과연 일제를 통해 달성된 것인가. 일제를 통해 이식된 자본주의는 과연 조선인의 것이었는가.
본지에서는 위의 물음에 관해 두 차례에 걸쳐서 세 가지 관점을 다룰 예정이다.

(1) 식민지기의 경제성장과 해방 후까지의 연속 - 이영훈(서울대 경제학과)
(2) 식민지기의 경제성장, 조선인을 위한 것인가 - 허수열(충남대 경제학과)
(3) 이식된 자본주의와 현재 한국의 자본주의 - 정태헌(본교 한국사학과)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 1910~1945년간 한반도에는 경제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가.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의 보통의 한국인은 일제가 야만적인 방법으로 한반도의 토지와 식량과 자원을 수탈하였다고 알고 있다. 예컨대 일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시행하여 농지의 40%를 기만적으로 수탈했다. 총칼을 들이대고는 식량의 50%를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지난 40년간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이러한 내용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교과서를 집필한 몇몇 무책임한 역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필자는 이미 13년 전부터 그러한 비판을 여러 차례 제기해 왔다. 그럼에도 아직도 그러한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려 있음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기 조선의 경제 성장
일제는 그의 통치행위와 관련하여 비교적 자세한 통계자료를 남겼다. 1910년대 이후 한반도는 근대적인 통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통계만으로 역사를 온전히 이야기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통계의 시대에 살면서 통계를 제쳐두고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1988년 일본 히도츠바시 대학의 연구자들이 1911~1938년 한반도의 국내총지출을 비롯한 국민경제통계를 작성했다. 드디어 올해에는 한국에서 김낙년 교수가 중심이 된 경제사연구자들이 1910~1940년 한반도의 국민경제통계를 정비했다.<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0> 전자보다 질적으로 많이 개선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제시된 그림은 이 새롭게 정비된 통계에서 구할 수 있는 1911~1940년 한반도 주민의 1인당 실질소득의 추이를 동기간 일본, 미국, 영국, 독일, 인도, 멕시코의 여러 나라와 비교한 것이다. 1911년의 1인당 소득을 공통으로 100으로 둔 소득지수의 비교이다. 이들 여러 나라의 1인당 소득에 대해선 앙구스 매디슨(Angus Maddison)의 <세계경제: 역사통계>를 참조할 수 있다.


맨 위에서 서로 겹치면서 가장 급하게 성장하고 있는 두 지역이 한반도와 일본이다. 두 지역 모두 동기간 1인당 실질소득이 2배가량 증대하였다. 20세기 전반의 세계자본주의는 정체와 위기의 시대였다. 그런 가운데 후발자본주의인 일본의 경제성장이 세계적으로 가장 두드러졌다. 한반도가 그 일본과 성장 궤적을 나란히 하고 있음은 다름 아니라 한반도가 일본제국의 일부분으로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에서 어떤 지방은 성장하고 다른 어떤 지방은 쇠퇴하는 일이 있을 수 없듯이, 한반도는 일본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따라 일본만큼 성장한 것이다. 필자는 이 그래프에서 한반도 식민지기의 경제사를 거의 모두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 목적은 그들이 오끼나와와 홋카이도를 그렇게 하였듯이 일본제국의 일환으로 영구병합하기 위함이었다. 이 원대한, 무모하기도 했던,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한반도에다 일본과 동일한 경제제도를 이식시켰다. 1912년 일본의 민법을 한반도에도 시행하는 조선민사령이 공포됐다. 이를 통해 각종 물권 및 채권에 걸쳐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했다. 저작권 등 각종 형태의 무체재산권에서도 사유재산제도가 포괄적으로 성립했다. 뒤이어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해 소유자와 토지가격을 사정하는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됐다. 나아가 화폐, 은행, 신탁, 보험, 거래소 등 근대적 형태의 시장기구가 이식됐다. 도로, 철도, 항만, 통신 등의 사회간접자본도 확충됐다. 1920년대에 이르러선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관세가 폐지됐다. 두 지역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하나의 자유시장으로 통합됐다. 이러했기 때문에 위의 그림에서와 같이 식민지기 한반도에서 일본을 따라 일본만큼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일을 두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그것은 경제학의 상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경제발전에 따라 한반도의 산업구조는 고도화하였다. 새로운 추계에 의하면 1910~1940년에 걸쳐 1차산업의 비중은 71%에서 43%로 감소하고, 2차산업이 7%에서 29%로, 3차산업이 22%에서 28%로 성장했다. 1940년 한반도는 여전히 농업이 가장 우세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공업화를 성취한 산업구조를 보유했다. 성장의 원동력은 1930년대 전반까지는 쌀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하는 일본과의 무역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대량의 자본수입이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한반도에 군사 관련 공업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경제성장의 분배 - 조선인과 일본인
성장의 과실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얼마나 공평하게 분배되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논쟁거리이지만 관련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히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몇 가지 현실적인 가정에 입각하여 그 실태를 그럴듯하게 시뮬레이션해 보는 것이 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예컨대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의 소득수준이 일본 내의 일본인보다 2배 정도 높았다는 전제에서 한반도 내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소득 수준을 비교하면, 1910년 일본인의 소득수준은 조선인보다 5.25배나 높았는데 1940년까지 6.86배로 격차가 벌어졌다. 그렇지만 동기간 조선인의 1인당 소득수준은 50%의 증가를 보였다. 같은 기간, 조선인의 소득수준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는 극단적인 가정 위의 시뮬레이션에서는 한반도 내 일본인의 소득수준이 일본 내 일본인의 그것보다 무려 5.6배나 높아지는 있을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요컨대 민족 간 격차는 벌어지고 있었지만 조선인의 실질소득은 증가하고 있었다.

경제성장의 분배 - 조선인과 조선인
성장의 과실이 조선인 사이에서 얼마나 골고루 분배되었는지도 따져야 할 문제다. 임금소득의 추이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일부의 숙련노동자를 제외한 다수의 미숙련노동자와 농업노동자의 실질임금에서는 개선이 없었다. 경지가 조금 뿐인 소농들의 실질소득에도 볼만한 개선은 없었다고 보인다. 경제성장의 혜택은 농촌부의 상층농과 지주, 그리고 도시부에서 근대부문에 종사한 상공업자와 화이트칼라에 집중됐다. 이러한 소득의 계층 간 불공평은 모든 나라의 자본주의 초기 역사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다. 하층 농민과 노동자의 실질소득이 증가하기 힘들었던 가장 중대한 원인은 갑작스런 인구증가였다. 식민지기에 걸쳐 인구는 53%나 증가하였다. 1930년대부터 일본과 만주로 빠져나간 인구를 포함하면 근 70%의 증가율이었다. 식민지 자본주의는 농촌에 점점 많아진 과잉인구를 흡수할 능력이 없었다. 한반도의 자본주의가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1960년대가 되어서다.

식민지기 경제성장이 남긴 것
이제 마지막으로 식민지기의 경제성장이 해방 후 한반도의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를 따지도록 하자. 실은 이 문제를 자세히 논하기에는 관련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성급하게도 정확하지 않은 주장들이 자주 제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핑계로 하면서 여기서는 어느 정도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범위에 한해서 조심스럽게 평소의 생각을 펼쳐본다.

남한이 식민지기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물적 자본이라기보다 인적 자본과 제도가 중심이었다. 식민지기에 남한은 농업이 중심 산업이었고 공업이라 해 봐야 면방직 등의 경공업이 중심이었다. 도시 주변에서 기계기구공업이 발전하였다고 하나 대부분 원동기가 설치된 대장간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 공업시설의 상당 부분은 해방 후의 혼란기에 망실되거나 6ㆍ25전쟁 통에 파괴됐다. 반면에 남한은 식민지기에 이식된 사유재산제도를 비롯한 시장경제의 기초 제도와 은행 등의 시장기구들을 잘 보존했다. 그 위에 미국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가 도입되자 자유기업주의가 경제행위의 기본 원리로 정착했다.

또한 남한은 식민지기에 조선인 스스로가 축적한 기업가능력, 곧 인적 자본을 풍부히 계승했다. 북한이 사회주의화하자 대량의 상공업자들이 남으로 내려온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들은 남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남한은 이러한 무형의 시장경제제도와 풍부한 인적 자본으로 1960년대 이후 유리한 국제시장의 환경이 조성되자 그에 적극 부응하면서 비약적으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물적 자본이 빈약하였기에 오히려 운신의 폭이 컸던 셈이다.

▲ '한반도는 일본제국의 일부분으로 포섭돼 일본과 성장 궤적을 나란히 하게 됐다'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식산은행(위), 북한의 비날론 공장(좌)과 이승기 박사


한편, 북한의 사회주의자들은 1946년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설치한 모든 법령과 제도를 폐지했다. 그 통에 인류사에서 가장 값진 문명 요소라 할 수 있는 사유재산제도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에 따라 대량의 인적 자본이 남한으로 쫓겨 왔음은 조금 전에 지적한 그대로다. 반면에 북한은 일제로부터 풍부한 공업시설을 인수했다. 이와 관련하여 1930년대 후반 이후, 특히 1940년대 전반에, 북한 지역에 일제가 실로 방대한 규모의 군사 관련 공업을 건설하였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1인당 발전량과 철도거리는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소련군의 조사에 의하면 1946년 북한에는 1천34개의 공장이 있었는데, 828개가 정상 조업을 하고 있었다. 그 중심은 제철, 제련, 비철금속, 전기, 화학, 기계 등의 중공업이었다. 그 가운데 북한의 지배자들이 특별히 공을 들인 것이 병기공장이었다. 1949년 북한은 소총,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화약 등의 기초 화기를 자력으로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남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6ㆍ25전쟁은 이 같은 남북한의 생산력 격차에 의해 유발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북한의 사회주의자들은 일제가 전쟁을 위해 북한에 건설한 군사공업을 계승하여 6ㆍ25전쟁을 도발하였다. 역사에서 이만한 아이러니를 어디 다른 데서 찾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한 가지 예만 더 들자. 한국 과학사의 연구자들은 북한의 사회주의가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자력갱생을 부르짖을 때 1959년 이승기 박사가 함흥의 질소비료 공장에서 인조섬유 비날론을 개발한 것이 큰 격려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대 남북한을 통틀어 최고의 과학자였던 이승기 박사는 일본의 교오토대학 출신이다. 그가 비날론을 개발한 공장은 1929년 일제가 함흥에 건설한 당대 세계 5위의 질소비료공장이다. 필자는 이러한 일제의 인적 및 물적 유산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현대 북한의 경제사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식민지기의 공업화와 경제발전은 여러 수준에서 해방 후 남한과 북한의 경제사를 깊숙이 규정하였다. 양자의 관계를 두고 손쉽게 단절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지만, 때때로 지나치게 정치적 발언이란 느낌을 받는다. 남한과 북한에 골고루 시선을 던지면서 제도와 물적 인적 자본과 기술의 여러 수준에서 연속과 단절의 실태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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