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실린 이영훈 교수 글의 요체는 일제 하에 자본주의 발전으로 경제가 성장했고, 그 유산이 단절되지 않고 해방 후 경제성장에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이번 호에 실린 허수열 교수의 글과 사실 '적대적'이어서 이미 학술논쟁의 영역이 아니다. 다만 본인들이 말한 것처럼,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이하 경제성장론)이 제시하는 통계가 혼동되는 경우가 많아 허 교수와 다른 각도에서 간략한 비판을 하겠다.

일반적인 식민지상을 보면, 자본주의 제도를 이식해 구래의 사회체제를 개편시키는 제국주의의 수탈방식과 구래의 사회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전근대의 지배 · 복속관계를 구분하지 않고 일제가 "하여간 빼앗아 갔다"라는 타성에 기초한 원시적수탈론이다. 때문에 경제성장론이 새로워 보일 수는 있다. 역사학계의 연구는 이러한 원시적수탈론을 넘어선지 이미 오래지만 늘 색다른 것을 찾는 언론에 경제성장론 연구가 보도되니까 일반인들에게 새롭거나 그럴듯한 논리로 부각되는 점도 있다.

제국주의 이해관계를 위해 일본 자본이 지배하는 식민지자본주의는 당연히 성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를 보유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식민지가 성장했는지에 대한 확인이 중요하진 않다. 국가를 상실한 식민지자본주의의 구조적인 특징과 발전 전망, 자본가층과 유산층의 귀결점이 어떠하며, 이러한 사회변화의 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더 중요하다.

식민지자본주의의 특징은 특히 전시체제기에 뚜렷했다. 강제동원과 가혹한 물자수탈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자본의 독점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이 단순노무직에 집중되는 고용구조의 근간에는 질적 변화가 없었다. 단기적 생산극대화 방침 속에서 경제외적 강제에 의존한 독려에도 불구하고 자본생산성, 공장생산성, 노동생산성은 1939년 이후 마이너스로 반전됐다. 재정 · 금융기구를 통해 동원된 자금은 군수(관련) 산업에 집중됐다. 조선사회가 보유한 인적 · 물적 · 화폐 자원을 고갈시킨 전시동원은 결국 해방 후에도 평화산업으로의 전환과 경제 재건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인 자본가 층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소외된 채 식민통치의 효율성 차원에서 부수적으로 고려되는 범주에 불과했다. 틈새시장에서 생존을 모색했지만 발전전망을 가질 수 없었고 말기에 이를수록 축적기반이 약화, 붕괴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사회적 위치나 역할을 봤을 때, 지식과 부를 선점 · 독점한 자본가 군이 자본주의 문화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식을 전 사회에 전파하면서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서구의 자본가와는 전혀 달랐다.

경제성장론의 한계
이와 달리 경제성장론은 두 개의 키워드인 '경제성장'과 '자본가' 개념 중심의 아주 단순한 논리로 식민지 경제를 설명한다. 이 교수의 글에서 드러나듯이 무엇보다 식민지라는 현실은 찾아볼 수 없다. “일본과 한 나라가 된 조선은 일본과 같이 발전했다”는 일본에서도 극우인사들이나 하는 말을 서슴없이 주장한다. 그리고 허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구태의연한 식민사학 방법론에 통계를 갖다 맞추는 일까지 행한다.

경제학 교재에만 존재하는 ‘국가 범주를 배제한 추상적 세계’와 달리, 현실의 자본주의는 시장의 힘을 넘어 국가의 폭력을 배경으로 전개됐다. 자본이 국경을 벗어날수록 자본가에게는 국가의 힘이 필수적이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시장 뿐 아니라 국가가 존재할 때 비로소 제도화된다. 자본가 계급이 정책의 운용과 결정을 주도하는 공간이자 물리력의 근간인 국가의 존재 여부, 국가의 보호와 배경 없이 논하는 자본주의 일반론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근대경제학이 인식하지 못하는 범주에 대해 경제학의 빗나간 '자부심'만 드러내는 경제성장론은 오로지 '자본가, 경제성장'만 동어반복할 뿐이다. 식민지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성과 성장한 생산력의 향방, 국가 간 수탈, 경제성장의 주체와 분배 문제, 식민지민의 삶의 문제 등은 관심대상 밖이다. 그리고 아무 전거도 없이 일제 하의 경제성장이 해방 후 한국의 자립사회 재건과 1960년대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 인천항의 곡물계량장. 일본 상인들은 우리 농민에게 돈을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붙여서 쌀로 받아가는 방법을 사용해 다량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됐다.

해방 후 경제발전의 배경
그러면 해방 후 경제발전의 배경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대외종속성이 강했지만 국가를 회복한 조건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냉전체제 하에서 국가 만들기의 일방적 동원 대상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운동과 이에 대응한 국가권력의 수동적 변화에 의한 결과였다.

분단시대 들어 국민은 국가권력에 의해 통제ㆍ동원되는 거민에 불과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 4ㆍ19를 계기로 민주화와 분단시대를 지양하는 주체로서 거민 수준을 벗어난 민주적 민족적 '국민' 의식이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이는 독재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도 지배정책의 변화를 촉구했다. 이승만 정권은 민주적 민족적 국민 의식을 흡수하기 위해 경제개발정책을 입안했고, 이 안은 장면 정부에 의해 시행됐다. 군사정부는 '생활'을 나아지게 하는 대신 민주적 민족적 국민 '의식'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병행했다. 이 시기 경제성장의 성과는 확산과 동시에 지배정책에 흡수되는 초기적 양면성을 띤 민주적 민족적 국민 의식과 권력의 대립적 피드백의 산물이었다.

제도적 차원을 넘어 각 분야에서 끝없이 추구되는 민주화는 생산성과 직결된다. 1970년대를 지나는 동안 남북한 경제력의 역전은 군사독재 하에서도 힘들게 추구된 민주화 대장정과 궤를 같이한다. 민주화운동이 질적으로 발전한 1980년대에도 경제성장은 지속되었고, 자본축적 방식도 저임금과 노동탄압에 의존하던 단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자원 동원의 민주화와 투명성이 넓어질수록 인적 · 물적 생산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토지조사사업의 수탈적 성격
지난 호에서 이 교수는 일제의 토지수탈론을 새삼 부정했다. 그러나 토지조사사업 성과 중 하나가 바로, 광무양전 때까지 유지된 일본인(외국인)의 토지소유금지 조항을 해제함으로써 일본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제 환경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해방 후 남한의 경우 일본인 소유농지(신한공사)가 경작지의 12.3%나 되었고, 신한공사 경지의 52%가 기름진 전라도에 집중됐다. 경작권, 입회권 등 농민의 여러 권리가 부정되어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대한제국 황실 소유지 12만여 정보가 조선총독부 소유(국유지)로 전환됐고, 임야조사사업으로 전국 임야의 60%가 국유림으로 창출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 명확한 수탈을 무시한 채 민유지 강탈은 없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무상으로 창출되어 국유화 된 토지나 임야의 상당 부분은 이후 불하를 통해 일본인, 상인, 회사의 소유로 넘어갔다. 사업은 '사업'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성장론 비판
경제성장론이 한국의 민주적 선진사회 진입을 거론할 때 말하는 전화의 유일한 동인은, 일제 지배, 미국의 점령지가 된 우연한 계기가 아니었으면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자본가뿐이다.  자본가들이 자본축적과 발전전망을 만들어내는 공간인 국가의 회복 등에 대한 원초적 의문은 경제성장론에 없다. 그리고 이제 치열한 사상전을 표방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주장한다. 이는 한국사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강조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부정한 채, 일본국가주의에 기댄 반국가적 반민족적 논리가 ‘반북 정서 기류’에 편승하면서 애국을 자처하는 카멜레온 같은 변신에 불과하다.

정태헌(본교 교수·한국사학과)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